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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인리

목종

1009년의 일입니다.


천추태후가 조정을 장악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종은 본래 사냥을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쾌활한 성격이었으니, 큰 웃음을 잘 웃고 여러 가지 일에 열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천추태후와 점차 갈등을 빚게 되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궁전 생활에서도 점점 믿는 사람이 없어지고 의욕을 잃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목종의 마음을 사로 잡은 사람이 유행간이라는 사람입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유행간을 설명하면서 먼저 자태가 "미려(美麗)", 곧 "아름답고 고왔다"라는 점을 특징으로 꼽고 있습니다. 남녀를 통틀어서도 이런 묘사를 사람의 첫번째 특징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많지는 않습니다. 워낙에 외모가 출중했기 때문인지, 목종은 유행간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유행간을 애인으로 삼게 됩니다.


유행간의 아버지는 유품렴이었는데 유품렴은 위위소경 벼슬을 지냈다고 하니, 아마도 군인이나 무예를 연마하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렇다면 유행간도 아마 무예를 익힌 사람으로 몸이 날렵하고 활쏘기나 칼싸움에 재주가 있는 사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목종은 유행간을 애인으로 삼은 뒤에 유행간의 관직을 높여 주어 합문사인으로 삼았습니다. 궁전에서 믿을 사람이 워낙 없으니 애인인 유행간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여러 일을 맡기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고려사"에서 유행간과 함께 언급되는 인물은 유충정입니다. 유충정 역시 별다른 재주는 없었는데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출세한 인물이라고 나옵니다. 역시 충성심이라든가 목종과의 개인적인 친분때문에 가까워진 인물로 보입니다. 목종은 유충정에게 지은대사(知銀臺事)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은대"가 조선시대에 임금의 비서 역할을 하는 승정원의 별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임금 옆에서 여러가지 사무를 보는 부서의 관직을 준 듯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임금이 총애하는 인물 중에 무예가 뛰어난 인물이 유행간이었다면, 유충정은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임금이 가까이 둔 인물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추태후 시대의 말기에 목종은 혼란을 느끼면서 고민하던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천추태후가 원하는 허수아비 임금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천추태후 반대파 신하들이 원하는 대로 천추태후에 반발하여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도 못했습니다. 제 상상일 뿐입니다만, 만약 1007년에 있었던 원성왕원손 사기 사건이 천추태후가 자신의 반대파와 목종을 공격한 사건이었다면, 목종은 "천추태후 반대파라는 신하들도 누가 부정부패에 엮여 있을 지 모른다"고 실망했을 만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목종은 더욱더 바로 곁에 있는 애인 유행간과 유충정만 믿었습니다. 목종은 모든 일을 할 때 마다 항상 유행간과 의논하고 일했다고 하며, 유행간은 특히 기세가 대단하여 궁전 사람들이 거의 임금을 모시듯이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유행간은 어지간한 다른 신하들을 무시하면서 맞서서 "고려사절요"의 표현을 빌면 "벼슬아치들을 턱짓으로 부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행간과 유충정은 부하들과 함께 궁전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워낙 괴상하게 돌아가는 판이다 보니, 유행간과 유충전 두 사람들이 거느린 부하들도 특이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부대의 병사들을 부하로 거느렸다거나, 어떤 학파의 제자들을 부하로 거느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과 함께 수방인리(水房人吏)들이 위세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방(水房)"이라는 궁전 안에 있는 기관의 하인들, 하급 관리들을 유행간등이 부하로 거느렸던 것 같습니다. 수방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한 편인데 대체로 궁전 내부에서 사용하는 물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던 곳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나중인 원종 시대에는 임금이 궁녀들을 "수방"에 모아 놓고 너무 방탕하게 놀았기 때문에 수방을 궁전 바깥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는 수방이 아마도 궁전의 목욕탕이나 수영장 내지는 목욕탕과 각종 물놀이를 관리하는 부서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고려시대 사람들은 목욕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중국 송나라의 사신인 서긍이 "고려도경"에 남긴 기록으로 고려 사람들은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해서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고 기록해 놓은 구절입니다.


그 이외에도 고려시대 사람들이 쓴 목욕 문화에 대한 기록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중지가 쓴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이라는 시에서는 지금의 부산 금정산 지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부산 동래 온천을 언급했고, 동래 온천이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온천을 끼고 숙박시설도 휴양지로 갖추어져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방심처석개당(洞房深處開石塘)"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박효수의 시에도 온천에서 목욕하는 광경을 묘사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돌로 연못처럼 만들어 놓은 목욕탕이 있어서 그 깊이는 두 자, 그러니까 대략 60 센티미터쯤 되는데 밤에도 촛불을 켜놓고 목욕을 하는 운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시에서는 등을 밀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단순히 하인을 같이 데려온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온궁영괴대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공공누리1

(온양 온천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시대의 온천 목욕탕 시설 구조를 그려 놓은 것입니다. 영괴대라고 표시되어 있는 나무들은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그 앞에 새겨둔 비석이 아직도 온양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저런 기록을 보면, 궁전에도 목욕 시설이나 그 비슷한 물놀이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궁전 안에 있는 시설로 물과 관련이 있는데 여러 사람이 일해야 하며 임금의 휴식과 놀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저는 수방을 목욕탕아니면 일종의 풀파티를 하기 위한 시설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수방인리라는 사람들도 곧 목욕탕 일꾼들, 등 밀어 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천추태후 말기, 목종이 마지막까지 믿었던 신하들은 유행간, 유충정 두 사람과 그들이 거느리고 다니는 목욕탕 일꾼들과 등 밀어 주는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유행간, 유충정과 수방인리들의 무리는 나중에는 위세가 대단해져서 드나들때 "주제넘는 정도(僭擬)가 한도 끝도 없었다(無極)"라고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종이 점점 놀기에 열중하면서 궁전 내에서 너무 지키는 것 없이 함부로 노는 모습을 지적한 것일까요? 그게 아니면, 조정이 워낙 이상하게 돌아가다 보니 목욕탕 등 밀어 주는 사람들의 부대가 조정에서 가장 위세 높은 사람들이 된 모습이 너무 황당하다는 뜻이었을까요?


결국 이 해 1009년에 천추태후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목종은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싫어했던 듯 보입니다만 천추태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목종 역시도 남아날 길은 없었습니다. 천추태후는 아들이 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지 마지막까지 답답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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