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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정문

천추태후

1009년의 일입니다.


조정을 손에 쥐고 있던 천추태후는 이 해에 결국 망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고려 조정도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천추태후를 싫어했던 아들, 허수아비 임금 목종도 결국 옥좌에서 내려 오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로운 동굴의 작은 왕자님", 현종이 기적과도 같이 산 중의 사찰에서 나와서 옥좌에 오르게 됩니다.


천추태후가 망하던 무렵의 사건들은 혼란스러워서 정확한 흐름과 진실을 알아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 중 인물들의 의도, 생각, 동기에 관해 설명한 부분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사실 자체도 조금은 조작되어 있는 대목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로 상황은 헛갈립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천추태후 몰락의 간접적인 계기가 된 1009년의 천추전 화재 사건까지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009년 음력 1월에 목종은 궁전의 상정전이라는 곳에 가서 관등(觀燈), 즉 등을 구경하는 행사를 했습니다. 거리에 온통 등불을 화려하게 밝혔던 큰 규모의 연등회 축제는 앞서서 성종 시대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궁전 안에서는 여러가지 아름다운 등을 만들어 그 등불을 구경하는 행사를 하기는 했나 봅니다. 혹은, 이 무렵 방탕하게 지내며 한창 여러 가지 잔치에 관심이 많아진 목종이 연등회 구경해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등불 구경 좀 한 번 화려하게 해 보자고 제안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밤에 등불을 한참 구경하던 중에 갑자기 궁전 한켠에서 불이 납니다. 기름 창고에 먼저 불이 났고 그 불이 옮겨 가서 천추전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은 거세게 타올라서 궁전 속의 여러 건물들을 태웠습니다. 천추전은 바로 천추태후가 일하는 곳으로 쓰던 건물이었습니다. 천추태후라는 별명 그 자체의 이유가 된, 천추태후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바로 천추전이었습니다.


목종은 화재를 보고 대단히 슬퍼하고 탄식했으며 그 후 심각하게 병이 들 정도였다고 "고려사절요"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목종은 궁전 문을 잠그고 삼엄하게 지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유충정, 유행간 등에게 밤새도록 계속 근처에 있으면서 자신을 지키게 했습니다. 아마 수방인리의 무리들도 목종을 지키는데 동원되었을 겁니다. 몇몇 신하들에게도 역시 자신을 지키며 계속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습니다.


현화사 석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공공누리1

(현화사는 목종 다음 임금인 현종이 세운 것입니다. 이 석등도 불을 밝히기 위한 등이었으니 이 무렵 등불이 어떤 모습으로 빛났는지 상상할만한 단서는 되어 줄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만 보면 그냥 기름 창고에 난 불이 번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목종이 병이 날 정도로 슬퍼했다는 이야기와, 유충정, 유행간 등의 무리를 곁에 두고 궁전을 철저히 지켰다는 뒤의 이야기와 꼭맞아 들지가 않습니다. 이 화재로부터 목종이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무엇인가 아주 놀라고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라고 해야 궁전을 철저히 지키라고 했다는 뒤의 내용과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누군가 궁전에 불을 질러 목종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종이 이 정도로 겁을 낼 정도의 인물이라면, 조정을 손에 쥐고 있는 어머니 천추태후를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추태후, 천추태후의 애인 김치양, 천추태후 지지파의 무리들과 임금인 목종의 관계가 너무 멀어졌기 떄문에, 이제는 천추태후 세력이 목종을 암살해 버리고 천추태후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이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려고 시도 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런 이야기라면 목종이 겁을 먹고 놀랄 만 합니다. 친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점이 충격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천추태후가 자신을 노린다면 온 나라가 자신을 노린다는 이야기이니 헤어나오기 힘들 거라는 뜻도 됩니다.


남아 있는 역사 기록도 약간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목종이 사망했을 경우, 그 다음으로 옥좌를 이어 받을 수 있는 서열의 인물은 지금의 북한산인 삼각산의 사찰에 갇혀 있던 어린 현종이었습니다. 때문에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주기 위해서 어린 현종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목종도 이런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나이의 현종이 암살된다고 하면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목종이 천추태후 몰래 현종이 살 수 있도록 애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천추태후가 친 조카인 현종, 첫번째 친 아들인 목종을 차례로 제거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김치양의 자식을 옥좌에 올리려고 계획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엮어 보면 1009년 천추전 화재 사건도 목종 암살 시도라는 느낌은 더 강해집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이야기에는 껄끄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일단 아무리 그래도 천추태후가 자신이 조정을 손에 쥐게 해준 중요한 이유였던 친 아들 목종을 스스로 없애 버릴 이유는 별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추태후와 목종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천추태후는 계속해서 적당히 목종을 제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치양과 낳은 둘째 자식에게 임금 자리를 주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서두를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천추태후 스스로는 목종을 암살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김치양이라든가 다른 천추태후 지지파 신하가 앞장 서서 꾸민일일까요?


아예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즉, 1009년 천추전 화재 사건은 천추태후가 목종을 암살하려고 한 사건이 아니라 반대로 목종 쪽에서 어머니인 천추태후를 암살하려고 한 사건이라는 생각입니다.


불에 탄 건물은 천추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표도 천추태후라고 짐작하는 것이 가장 간단합니다. "태후께서는 천추전에서 등불을 구경하십시오."라고 이야기 해서 천추전에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함께 들어가게 하고, 바깥에서 문을 잠가 버린 뒤 누군가 불을 질러 버린다면, 천추태후를 화재를 가장해서 암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을 지르는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천추태후는 탈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목종이 직접 천추태후를 암살하라고 지시하지 않더라도, 천추태후 반대파로 목종 곁에 있던 어떤 신하가 그런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수도 있다고 해 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이런 계획을 목종이 뒤늦게 알게 되거나, 혹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목종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추태후가 반격해 올 것을 걱정하여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1009년 천추전 화재의 진상일까요?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빛을 뿜는 등불 관람 행사를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실권자인 어머니가 임금인 아들을 암살하려고 한 끔찍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임금인 아들이 실권자인 어머니를 암살하려고 한 끔찍한 일이었을까요?


정확한 진실을 지금에 와서 알아낼 도리야 없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여러 가지 상상 중에 제 마음에 가장 드는 진상은 이런 것입니다.


정치 다툼 문제에 지쳐 괴로움에 빠져 있는 목종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천추태후는 등불을 관람하는 행사를 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오래간만에 따뜻하게 제안 해 온 어머니 천추태후의 말에 목종도 그러겠다고 합니다. 밤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곳에서 등을 구경합니다. 목종은 아름다운 등불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어머니와 터놓고 이야기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떠올려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신하들게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전하거나 선물을 전하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천추태후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을 날아 오르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참새 모양의 등불 하나가 조금 부서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 오르게 됩니다.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작은 참새 등불 하나가 기름 창고에 빠지고, 그 불이 천추전을 태웁니다. 그러니까, 1009년의 천추전 화재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 작은 등불이 갑작스런 바람에 떠밀려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자 목종은 갑작스럽게 절망하게 됩니다. 그 동안 쌓여 있던 의심이 너무나 많았기에 우연한 화재를 보고도 바로, 천추태후가 이 기회에 자신을 암살하려고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은 아닐까 겁을 먹게 됩니다. 반대로 천추태후 역시 아들 목종이 자신을 몰아 내려고 암살을 시도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둘은 상대방을 경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상대가 경계하는 것을 보고 상대가 공격을 시도한 것이 맞다고 확신하며 점점 더 강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결국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돌아 가서 둘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이후 조정의 혼란은 커다란 정변으로 이어지며 천추태후가 망하고 목종 또한 몰락하는 최후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천추태후의 시기는 결국 끝을 맺습니다.


천추태후와 목종이 망한 후 그 다음 현종 대 부터 시작되는 현종, 덕종, 정종, 문종, 4대에 걸친 70여년의 시기를 두고 고려 후기의 학자 이제현은 "현덕정문(顯德靖文)"이라고 하여, 고려 시대의 평화롭고 번창했던 좋은 시절이라고 꼽아서 설명했습니다. 굳이 따져 보자면 현종 시기도 초기는 혼란스럽기는 합니다만, "현덕정문"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마침 "덕이 나타나고 학문을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역시 평화로운 좋은 시절에 어울리는 말이 됩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시리즈는 여기까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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