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이번 생에는 같이 선행을, 다음 생에는 함께 진리를

천추태후

997년의 일입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목종이 옥좌에 오르자, 세상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 황보씨의 손에 들어 갑니다. 천추태후는 궁전의 천추궁이라는 건물에서 머물면서 일을 했습니다. 때문에 "천추태후"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습니다.


천추태후는 궁전을 장악하고 고려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목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17세, 18세 무렵이었는데도 "임금이 아직 어려서 경험이 없으므로 어머니인 내가 대신 통치한다"는 식으로 천추태후가 나라의 많은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10년이 넘게 지나서 목종이 옥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성종이 친척 조카 뻘인 목종에게 순순히 임금자리를 넘겨 준 것도 어찌 보면 천추태후가 뒤에서 열심히 조종하고 개입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종은 목종을 꺼림칙하게 여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란 다름 아닌 바로 천추태후였습니다. 서로 남매지간이었던 천추태후와 성종은 한 가지 일 때문에 관계가 멀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천추태후의 남편이자 목종의 아버지였던 경종은 너무 젊어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때 당시 천추태후의 나이가 18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천추태후는 그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는 하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너무나 많은 성격이었을텐데, 졸지에 그런 처지가 되자 천추태후는 무척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던 천추태후는 김치양이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외가 쪽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승려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에서 승려라고 하면 누구나 조금의 존경심은 보이는 사회였으므로 사기꾼이나 협잡꾼이라면 승려로 가장하는 것도 해볼 만한 시대였습니다. 궁전에 출입하며 왕후를 만나기 위해서 승려로 가장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기는 할텐데, 김치양이 멀쩡한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천추태후와 자연히 가까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처음부터 그런 사기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김치양이 애초부터 사기꾼이었고 그런 신분이었는데도 우여곡절 끝에 천추태후와 가까워졌다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는 이야기겠습니다. 어쩌면 김치양은 승려는 아니었지만 승려처럼 삶의 진리를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지내면서 마치 속세를 떠난 듯이 진기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던 사람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기꾼이건 철학자건 혹은 둘 다건 간에 김치양이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멋진 말을 하거나 아름다운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던 점은 뒤의 일을 보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천추태후가 김치양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김치양의 사상이나 멋이 소문났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편을 잃은 젊은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아마 사상이나 진리, 혹은 나라 돌아가는 것이나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빠인 성종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 서로 논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김치양은 성적인 매력이 아주 뛰어났다는 장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게 됩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천추태후는 이 무렵 궁전 안에서 지냈던 것 같은데, 김치양은 궁전을 드나들면서 천추태후와 사랑을 속삭였던 것 같습니다. 뒤의 기록으로 짐작해 보면 두 사람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축제인 연등회 때 등불을 구경하는 밤 동안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 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니 당연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습니다.


천추태후의 오빠인 성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추태후가 무슨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무렵 고려 시대의 제도로도 이것이 무슨 큰 죄가 될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저는 짐작해 봅니다. 그렇지만 성종은 자신의 동생이 궁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 거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싫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시기에 성종은 착한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며, 당시 기준에 따라 효자에게 상을 내리면서 남편이 세상을 뜬 뒤에도 재혼하지 않고 성의를 다해 시부모를 모신 며느리들도 찾아내어 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친동생인 천추태후가 애인을 궁전에 끌어들인다고 소문이 나고 있었으니 성종 성격에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성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떼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김치양은 성종의 명령으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먼 곳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천추태후의 형제 자매들도 참 묘한 사연인 사람들입니다. 천추태후의 언니인 헌정왕후도 왕욱을 애인으로 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왕욱과 이별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천추태후도 똑같이 김치양과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만 헌정왕후는 눈물을 흘리다가 곧 세상을 떠났지만, 천추태후는 그렇게 그냥 잊혀질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 간을 기다린 후, 성종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니 천추태후가 남편이 있던 시절 낳았던 목종이 드디어 임금이 될 상황에 놓입니다. 천추태후는 그 동안 바로 이 시기를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자기 편이 될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찾아 세력을 모아 두고, 새로운 인재를 찾아서 그 인재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하고 천추태후 자신을 위해 꾀를 내도록 했을 것입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나중에 천추태후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 대략 40명 정도는 되었던 듯 합니다. 천추태후가 발굴한 문인위 같은 인물은 훌륭한 인재로 나중에 명망을 떨쳐서 심지어 천추태후의 반대파들조차 그 실력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천추태후가 인재를 모으고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상당히 열심히 애썼던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생명연장을 빌기 위해 죄수들을 사면해 줄 것을 왕융이 권하자 "내가 지금 그런 은혜를 베풀면 다음 사람이 복을 빌기 위해 은혜를 베풀 때는 무엇으로 하겠느냐"라는 농담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그 말을 남겼던 바로 그 날 목종이 임금이 되었는데, 천추태후는 목종이 옥좌에 오를 때 마치 성종의 그 유언을 비웃듯이 바로 죄수들을 사면해 주면서 목종의 즉위를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태후는 조정을 손에 넣자 곧 귀양살이 가 있던 애인 김치양을 궁전으로 다시 불러 옵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합문통사사인이라는 관직을 주어 당당하게 궁전에 들어 올 수 있게 합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말을 자주 믿고 김치양의 독특한 사상을 많이 참고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모든 신하들의 관직을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이 모두 그 손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이용해서 신하들을 다스렸던 듯 합니다.


어울러 두 사람의 애정도 계속해서 잘 익어 갔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넣어 무엇인가 기부를 하거나, 복을 비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역사 기록에서는 김치양의 사상이 특이했기 때문에 무엇인가 기이한 것을 많이 만들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뜨이는 것으로는 궁성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왕"은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을 포함하여 저승 세계를 다스리는 임금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에서 시왕에 관한 그림은 저승이나 지옥을 그린 기괴한 그림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건설한 시왕사에는 특히 충격적인 그림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려사절요"에는 그림들이 "기괴난상(奇怪難狀)"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저는 옛날 괴물 이야기와 그림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그 그림들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동주에 성수사(星宿寺)라는 곳을 세우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름으로 보아 단순한 불교 사찰 같지는 않고, 별에게 무엇인가를 비는 주술적인 곳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천문학, 점성술과 관련된 곳이거나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은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건 김치양의 독특한 사상을 나타낸다는 느낌입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종, 그릇 같은 쇠붙이로 된 것을 만들 때에도 두 사람의 애정을 드러내는 글을 새겨 놓기도 했습니다. 요즘 남산 같은 곳에 자물쇠를 걸면서 "황보 + 김 우리 사랑 영원히"라고 써놓는 느낌입니다.


"고려사"에서는 김치양을 굉장한 악당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너무 눈꼴 신 행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건 두 사람이 새겨 놓은 글귀는 아름다운 편입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이번 생에는 동쪽 나라에 태어나 (當生東國之時 당생동국지시)

같이 자비의 씨앗을 뿌리고 (同修善種 동수선종)

다음 생에는 저쪽 세상에 도착해 (後往西方之日 후왕서방지일)

함께 진리를 증명해 보리라 (共證菩提 공증보리)


불교 느낌이 풍성한 글입니다. 두 사람의 애정을 읊으면서, "동수선종", "공증보리"를 이번  생과 다음 생에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우리 사랑 다음 생에도 영원히"라는 뜻인데, 운율도 잘 맞는 말로 되어 있어 멋집니다. 이런 말을 여기저기 새겨 놓았다고 하니, 이 무렵 고려에서는 사랑의 맹세로 "동수선종, 공증보리" 즉 "이번 생에는 같이 선행을, 다음 생에 함께 진리를"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법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워낙 이런 일을 많이 해서였는지, 두 사람의 애정을 나타내는 물건 중에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흔히 "고려국 금자대장경"이라고 부르는 유물인데, "대보적경"이라는 불교 경전의 32권 부분을 금칠한 글씨로 써 놓은 책입니다. 어떻게 넘어 갔는지 일본으로 건너 가서 지금은 교토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고려국 금자대장경. 출처 emuseum.jp

(발췌한 삽화의 모습입니다. 삽화는 은칠한 글씨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책 말미에 보면 태후 황보씨라는 이름이 먼저 나와 있고, 그 다음에 김치양의 이름이 있으며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기부해서 1006년에 이 책을 만들었다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1006년이면 여전히 천추태후의 위세가 당당할 시절입니다. 행복한 사랑의 세월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던 때였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삽화도 실려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그림 셋이 그려져 있는데, 혹시 그 셋 중 한 사람의 모습이 천추태후의 모습을 닮게 그려 놓은 것인 지도 모를 일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Jaesik Kwak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