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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면서까지 내 목숨을 연장하겠느냐

성종

997년의 일입니다.


저는 고려 성종 임금을 두고 조선의 세종 임금 같은 인물처럼 재능도 뛰어나면서 학식을 쌓는데도 부단히 매달리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재주는 평범한 편이지만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나름대로 계속 노력하는 성품의 사람이라고 상상해 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에 대해 굉장한 확신을 갖고 추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책을 열심히 읽고 책에 나온 착한 행동이라고 나와 있는 일을 정말로 해 보려고 항상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보니 대체로 너그러운 사람인 것 처럼 보이지만 좀 답답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입니다.


성종 시대의 고려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중국 송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고 송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많이 받아 들이려고 특히 애썼습니다. 그렇다 보니 송나라의 유학자들이 비판하는 여러 가지 주술이나 미신에 대해서도 성종은 점차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 조정에서 팔관회를 폐지한 이유 중에는 여러 산신령들과 용들에게 복을 빈다는 것이 잡신을 숭배하는 미신에 가깝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란의 1차 침입”, 즉 계사지역(癸巳之役) 전쟁 때 크게 놀라서 어떻게든 거란 군사를 돌려 보내 보려고 할 때, 성종을 비롯한 몇몇 조정 사람들의 생각은 다시 조금 더 바뀐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송나라의 좋은 문화를 받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지만, 군사력이 없고 실제로 경험과 기술이 없으면 송나라 문화를 따라하는 것 만으로 못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절절히 느낀 듯 보입니다.


실제로 고려 조정에서는 계사지역 직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같이 거란을 공격해 복수를 하자고 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송나라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유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계사지역 전쟁이 터지기 전에 역으로 송나라가 고려와 손을 잡고 거란을 공격하자고 했던 일이 있는데 괜히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본 고려 조정에서 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종은 깊이 실망했습니다. 이제야 고려도 거란에 원한이 맺혀 전쟁을 할 이유가 생겨서 나섰더니 이번에는 송나라가 싸움을 피하다니, 송나라는 대단한 강대국인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나중이 되어서는 더욱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발달한 외국 문화를 받아 들이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뿐, 적군의 병사들이 궁전을 목표로 쳐들어 오는 와중에는 고고한 이상을 강조하면 일이 저절로 풀린다거나 무슨 신령에게 복을 빌면 문제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생각은 쓸데 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저는 짐작해 봅니다.


하기야, 성종은 애초부터 미신을 탐탁찮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시기 고려시대 사람들은 날짜 중에 흉한 날과 운수 좋은 날이 있다는 것을 매우 심하게 따져서, 외국에서 사신이 와도 사신을 바로 만나지 않고 운수 좋은 날이 찾아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만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저의 상상일 뿐입니다만, 최지몽이 활약하던 고려의 천문학자들이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온갖 별의 움직임에 대해 여러가지 점성술을 따져 보고 “운 좋은 날에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송나라 사신은 고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운수 좋은 날이 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기다렸다가 궁전에 들어 가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송나라 사신들이 이 일을 두고 투덜거리자, 성종은 그때부터 좋은 날을 너무 심하게 따지지 말고 그 달 안에 가장 좋은 날을 적당히 택해서 사신을 맞이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그 외에도 등주에서 길이가 일곱 치 그러니까 20 센티미터 쯤 되는 벼 이삭이 나왔을 때, 기장 이삭의 길이가 1자 네 치 그러니까 40 센티미터 쯤 되는 것이 나왔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대단히 좋은 징조라고 신하들이 축하의 의식을 열자고 했을 때에도 성종이 거절한 일도 있었습니다.


긴 벼 이삭이라고 해봐야 그냥 평소 보다 쌀이 많이 나오는 풀일 뿐이지, 그런 모양으로 조금 희귀한 것이 생겼다고 해서 무슨 하늘이 임금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증거라고 여기며 좋아하거나, 갑자기 나라의 운이 좋아질 징조라고 여기는 것은 부질없고 황당한 생각이라고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성종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이야기는 바로 성종의 유언입니다.


삶의 마지막해였던 997년에 성종은 동경, 즉 지금의 경주로 행차를 떠났습니다. 옛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대도시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 중에 인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 가 본 행차였습니다.


성종 시기 가장 이름 난 신하이자 학자로 이름 높아던 최승로가 동경 출신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분명히 동경 출신인 최승로의 친구, 후배, 친척, 제자, 스승, 동문 등도 최승로 덕에 눈에 뜨여서 벼슬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성종이 어렸을 때부터 친구 같은 신하였고 세상을 뜬 후에는 뇌원차 1000각을 받았다던 최량 역시 비슷한 부류로 고향이 동경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동경 출신 인물들이 많이 눈에 뜨이다 보니 이 해에는 성종이 아예 동경에 직접 가 보기로 결심했나 봅니다.


그만큼, 최승로 파, 동경 사람들의 세력이 커진 것을 나타내는 행사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닌게 아니라, 후삼국시대의 장군, 성주 출신의 신하들이 광종 시대에 몰락한 후에는 아무래도 평화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재들이 필요 했을 겁니다. 아마도 동경 같은 오래된 대도시에서 학문이나 기술로 재주를 쌓아 온 인재들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성종의 동경 행차는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잔치도 멋지게 열었으며, 동경 사람들 중에 칭찬 받을 만한 사람들이 상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음력 9월 가을에는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쩌면 울산 앞바다에서 마침 고래를 잡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고래를 본 적도 없지만 용기는 넘친다는 도성 출신의 장수들이 다투어 고래 사냥에 나서는 모습을 성종이 구경했다면 즐거워 했을 만도 합니다.


그렇지만 성종은 동경 행차를 완전히 끝내기 전에 병이 났고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때 성종의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였는데 무엇인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성종은 바로 궁전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불과 1개월 만에 성종은 상태가 위험해져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됩니다. 성종은 후계자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애초에 성종이 임금이 되었던 까닭은 바로 전 임금인 경종의 아들이 갓난 아기로 너무 어려서 도저히 임금이 될 수가 없다고 하여, 경종의 친척 아우였던 성종이 자리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갓난 아기가 장성 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그 장성한 경종의 아들에게 다시 임금 자리를 물려 주기로 하니, 이 사람이 바로 목종이 됩니다.


이렇게 받았던 임금 자리를 다시 곱게 돌려 주는 것도 참 성종 다운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종은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하던 풍습대로, 최후를 준비하기 위해 사찰로 자리를 옮겨 머무릅니다. 내천왕사라는 사찰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며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신하인 왕융이 찾아 와, 성종에게 다음과 비슷하게 말합니다. 아직 늙지도 않은 임금이 몸져 누운 모습에 슬퍼하면서 무슨 수든 내어 보겠다는 말투였을 겁니다.


"세상에 원망을 줄이고 은혜를 베풀면 운이 좋아지고 복을 받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성상 폐하께서 이렇게 갑자기 병세가 깊어지셨으니, 갇혀 있는 죄수들을 여럿 사면해 주시어 널리 풀어 주면서 복을 받아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왕융은 쌍기와 함께 쌍왕이라고 불리우며, 고려에 과거 제도가 뿌리내리게 하여 세상을 뒤엎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쌍기가 과거 제도 초창기에 새로운 일을 크게 벌인 인물이었다면 왕융은 이후 차근차근 꾸준히 과거 제도를 이어 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왕융은 아마 성종이 믿고 존경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오랜 신하로 반가운 얼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종은 “복을 받기 위해 죄수를 풀어 주자”는 왕융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죄가 있는 자를 어찌 놓아 줄 수가 있느냐? 그렇게까지 해서 굳이 내가 옳지 않게 목숨을 연장해서야 되겠느냐? (何至釋有罪 枉求延命乎 하지석유죄 왕구연명호)"


그러면서 어차피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라의 정치와 법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죄를 다스리는 일은 목숨을 걸만큼 언제나 공평해야 한다고 말한 겁니다. 죄가 있는 사람의 처벌을 없애 주면서까지 자기 이득을 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성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게다가 내가 지금 죄수들을 풀어 주어 버리면, 다음 사람은 또 어떻게 은혜를 베풀 기회를 만들 수 있겠느냐?"


병석에 누워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기는 이야기 치고는 마치 농담 같이 들리기도 하는 말입니다.


성종은 이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각선사탑비.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 공공누리1

(전남 구례에 있는 연곡사에 현각선사탑비가 있는데 그 비문을 바로 이 이야기 속의 신하인 왕융이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 몸통은 파괴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다행히 그 글씨를 탁본한 자료가 남아 있어 내용은 어느 정도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화려한 문장을 많이 구사한 편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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