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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의 악당

천추태후

998년의 일입니다.


고려 전기, 10여년간 고려 조정을 장악한 천추태후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부정적인 평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천추태후 시기 바로 다음 임금인 현종이 천추태후의 적수였으므로, 천추태후에 대해 좋은 말은 남기 어렵고 나쁜 말은 남기 좋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최충은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았을 때 천추태후 무리를 두고 "천추의 악당(千秋之惡黨 천추지악당)"이라는 말을 쓰며 욕하기도 했습니다. 천추라는 말이 천추태후라는 뜻도 되면서 "천추의 악당"을 직역하면 "천년에 한번 나올만한 악당"이라는 뜻도 될 수 있으니 그런 말을 만들어 쓴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천추태후는 한 임금의 부인, 다른 임금의 생모, 또다른 임금의 친 이모였던 사람인데도 "천추의 악당"이라고 대놓고 부를 정도였다니 그 정도로 심하게 미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천추태후의 적이 태후를 증오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태후는 매력 있는 남자에 대해 알게 된 후 궁전에 그 남자를 끌어 들였는데 성종이 반대해서 떼어 놓자 거기에 원한을 품고 힘을 모으며 기다렸다가 조정을 장악하고 그 남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인물이며, 그 후에는 남자에게 빠져 국정을 망치는 악인입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 임금 자리를 이어 받을 다른 후손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하는, 그저 욕망에만 불타오르는 사람처럼 서술되어 버립니다.


조선시대 이후로도 천추태후에 대해 좋게 평가한 역사가는 드뭅니다.


그나마 조선전기의 학자 임상덕이 선악을 떠나서 그래도 끝까지 태후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서술에서는 예우를 해 주어야 한다라고 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선후기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나는 고려의 신하도 아닌데 예우해 줄 필요조차도 없다"면서 악인은 악인 답게 낮추어 서술해야 한다는 이유로 천추태후를 천추태후라고 쓰지도 않고 그냥 "황보씨"라고 쓸 정도였습니다.


워낙에 이렇게 과할 정도로 비난을 많이 받던 인물이다 보니, 정반대로 현대의 작가들은 천추태후를 엄청난 영웅 같은 인물로 묘사할 때도 간혹 있습니다. 심지어 거란과의 전쟁 때 천추태후가 갑옷을 입고 활을 쏘며 거란과 전투를 이끄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실제로 천추태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천추의 악당이었을까요, 아니면 천추의 영웅이었을까요?


막상 천추태후가 조정을 장악한 목종 시대 초기의 역사 기록을 보면, 천추태후는 그렇게 심한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라를 갑자기 급격히 발전시킨 영웅도 아닙니다. 계사지역(癸巳之役) 그러니까 "거란의 1차 침입" 전쟁 때 고생을 했으니, 차분하게 북방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거란과의 평화 관계는 순조롭게 유지해 나갔습니다.


몰래 군사를 기르고 방어를 위한 요새를 단단히 하면서도 최대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거란에게 제법 저자세로 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고려사"에는 없는 기록이지만 거란의 역사인 "요사"에는 고려가 거란에게 고려의 지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차하면 도움을 얻기 위해 거란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 송나라와도 비밀리에 교류를 계속하는 등, 딱 서기 990년대에 정상적으로 조정을 운영을 할만한 방식으로 조정을 운영했습니다.


그나마 눈에 뜨이는 것이 있다면, 998년에 열린 과거시험에서 명산업(明算業) 11명을 급제시켰다는 기록입니다. 명산은 직역하면 계산에 밝다라는 뜻으로 수학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수학자 11명을 과거 시험에서 합격시켜서 벼슬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고려시대 역사에서 명산업을 11명씩이나 합격시켜 관리로 만들었다는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저는 이것이 몇 달 뒤인 998년 음력 12월에 있었던 토지 제도 개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고려에서 사용하던 토지 제도는 "전시과"였는데 이것은 고려 특유의 제도로 토지에 대한 제도이면서 동시에 관리들의 월급을 주는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토지에 관한 제도를 개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땅의 넓이를 계산하고, 그 땅에서 생산될 곡식의 양을 통계적으로 추측하고, 세금의 비율을 환산하고, 세금으로 걷을 곡식을 운반할 때 드는 비용을 계산하는 등 많은 계산을 해봐야 합니다. 이런 계산을 잘 해내기 위해서, 천추태후는 유례가 드물 정도로 수학자들을 뽑아서 조정의 일에 활용했던 것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다르게 이야기 해 보면, 천추태후는 토지에 관한 제도를 바꿀 때 그냥 마구잡이로 바꾼 것이 아니라, 수학자들을 시켜서 정밀히 계산해 보게 하고, 최대한 그럴듯한 납득할 만한 계산 방식을 만들어서 제도를 고친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바꾼 제도를 사용하면 천추태후에게 더 유리하고 그 반대파에게는 더 불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제도를 만든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렇게 수학을 열심히 이용해서 정밀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토지 제도를 바꾸었다면, 천추태후가 싫다고 한들 반대파들이 "바꾼 제도는 틀렸다"면서 그저 반대하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은 천추태후의 업적에 속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보통 이 비슷하게 열심히 준비해서 무엇인가를 천천히 착실히 성장시키는 것은 알찬 일이지만 눈에 잘 뜨이지는 않기 마련입니다. 누군가 열심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 덕분에 조금씩 나라가 성장해서 어느새 부강해 지는 법인데, 급하게 세상을 뒤엎거나 커다란 난리를 친 사람이 아니면 눈에 뜨이지를 않으니, 열심히 일한 사람의 고생은 모르고 그저 "우리 민족은 원래 저력이 있어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 아니었는지요?


조선시대의 산가지. 국립민속박물관 소 장- 공공누리1

(산가지는 원래 옛 시대에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도구로 한국에서는 조선 말까지 옛 수학자들이 즐겨 사용했습니다.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에서 수학 과목은 "구장(九章)", "철술(綴術)", "삼개(三開)", "사가(謝家)"의 네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극 등에서 뭔가 학식이 풍부한 인물을 나타낼때 유교 경전을 줄줄 잘 외우는 사람을 보여 주는 장면 대신에 이런 수학에 정통한 사람을 보여 주는 장면이 나와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과목은 책 제목으로 보이는데, 이 중에 구장, 철술은 중국에서 내려오던 수학 고전이고, 삼개, 사가는 한국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삼개는 신라시대 때도 있었는데 김용운 선생은 백제 수학자가 쓴 책이 신라에도 퍼져서 자리잡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김용국 선생의 글을 보면 그 내용은 아마도 측량술, 즉 넓이를 계산하거나 삼각함수 등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가는 제목으로 보아 "사(謝)"씨라는 성을 쓰는 학자가 쓴 책으로 보이며, 김용운 선생은 다른 책의 주요 내용을 편집한 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사가"는 수학의 기초 핵심 내용에 관한 책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물론 그렇다고 천추태후가 나라를 다스린 것이 아주 훌륭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천추태후가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지낸 것 아니냐는 지적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후는 높은 건물을 많이 짓고 깊은 연못을 많이 만들면서 물자를 소모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중에 태후가 망한 뒤에 교방의 궁녀들을 내 보내고 낭원정을 허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천추태후 시절에 교방과 낭원정이 사치스럽게 운영되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교방은 궁녀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시설입니다. 천추태후가 망했을 때 교방에서 궁녀 100명을 내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100명 단위 이상의 궁녀를 교방에 두고 놀이에 사용하기 위해 여러가지 춤과 노래를 계속 만들어 보라고 시켰을 것입니다.


또 낭원정에서는 진기한 날짐승, 들짐승, 물고기들이 있어서 천추태후가 망한 후에 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일종의 동물원 같은 정원을 만들어 두고 놀았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마 호랑이, 표범이나 곰 같은 동물을 길렀을 듯 하고, 이 시기에는 거란과도 교류가 활발했으니 낙타를 길렀을 지도 모릅니다. 송나라에서 원숭이나 악어를 데려다가 사다가 길렀다는 이야기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꾸며 보자면, 천추태후가 아름다운 동물원을 만들기 위해서, "흰색 곰을 구해와라"는 명령을 내리자 한 몫 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온 나라와 외국을 뒤지며 흰 곰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험담 같은 것도 떠올려 봅니다.


천추태후 편에서 말해 보자면, 교방을 키우거나 낭원정을 짓는 것 정도는 광종 시절에 재물을 쓰던 것에 비하면 별로 그렇게 많은 재물을 낭비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고려사절요"에 목종이 사냥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낭원정에서 짐승을 기른 것은 어쩌면 천추태후의 놀이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아들인 목종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미 장성한 나이였는데도 어머니 때문에 허수아비 임금 노릇만 하고 있는 아들을 두고, 천추태후는 다른 일에 즐겁게 몰두라도 하게 해 주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저는 상상해 봅니다.


실제로 목종은 천추태후와 갈등을 빚게 되기도 합니다.


일단 "고려사"의 1002년 기록을 보면 목종이 군사들을 편성하는 일을 지시하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일을 잘못한 점이 있어서 반성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목종은 "누대를 높이 짓고, 연못을 깊이 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신하들이 권해서 한 것이었지만 내가 덕을 잃은 탓도 있다"라고 말을 덧붙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권했다는 신하"가 바로 천추태후와 김치양 무리들을 지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종이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자기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워둔 상황에서 궁궐을 호화롭게 꾸미는데 재물을 낭비한 천추태후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은 어머니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였으니 어머니 천추태후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천추태후는 싫어하고 목종에게만 충성하는 신하들도 없지는 않았을테니, 어머니와 한번 대결해 보자고 목종이 말을 꺼낸듯 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 지역에서 화산 활동이 일어 났습니다. 그러니 바다 속에서 불이 솟는 그런 현상이 하늘이 내린 나쁜 징조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늘도 지금 뭔가 잘못되어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어머니는 이제 좀 그만 하시라, 그런 말을 목종이 하고 싶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목종을 그렇게 움직인 천추태후 반대파 신하들이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얼마 후 탐라의 화산 활동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노력했는데, 과학적인 호기심일 수도 있었겠지만, 정말 천추태후가 뭘 잘못했다는 징조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저는 짐작해 봅니다. 


조선시대 제주지도. 출처 지리지 종합 정보

(제주도에서 과학적으로 최근에 분화가 확인되는 곳은 보통 송악산 지역 또는 2014년에 보도된 상창리 지역으로 보는데, 대략 5천년전 무렵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고려 시대 천추태후 시대인 1천년 전에 화산 활동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정확히 발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찾아낸다면 제주도 화산 연구에 대해 중요한 발견이 될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그 정도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목종은 끝까지 별로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목종은 점점 신하들을 못 믿게 된 듯 합니다. 목종은 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하든지 "저 사람도 사실은 어머니가 나를 감시하거나 나를 시험하기 위해 몰래 보낸 사람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고 살게 된 듯 합니다. 김치양과 목종의 관계도 계속해서 더욱 더 멀어졌습니다. 목종은 그래도 임금이었으니 남자판 콩쥐팥쥐 같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목종과 어머니의 새 애인인 김치양은 점차 원수 비슷한 사이가 될 정도가 된 듯 합니다.


천추태후가 조정을 손에 넣고 있었던 것은 1008년 무렵까지였습니다. 이 시기까지 천추태후는 목종을 묶어 두었으며, 새로운 인재를 자기 옆에 모아 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라를 더 부강하게 다듬어 나가면서, 또한 만약에 미래에 거란과 전쟁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착실히 군사력도 키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일이 좀 잘못 돌아갈 때도 있긴 했을 겁니다. 역사 기록에서는 특히 김치양의 행실에 문제가 많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김치양은 뇌물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굳이 뇌물이 아니라도 고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천추태후의 애인이니 재물이 부족할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김치양이 재물과 세력을 과시하며 위엄을 높이려고 드니, 천추태후의 반대파들, 천추태후 때문에 무엇이건 손해를 본 조정의 신하들에게 김치양의 그런 모습은 더욱 미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원래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김치양은 3백간이 넘는 커다란 저택을 지어 거기에서 살았으며, 높은 건물, 정원, 연못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꾸며 놓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추태후와 함께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렸다고 합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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