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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사람들, 묶여 있었던 자들이 뜻을 얻는다

대목왕후

960년의 일입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을 뿌리부터 바꾸는 과거 시험이라는 제도를 실시하는데 광종은 성공했습니다. 광종은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거침 없이 다른 일도 벌였습니다.


먼저 손을 댄 일은 956년에 시작한 "안검노비(按檢奴婢)"였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노비안검법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 역사 책인 “동사강목”에서는 “노비안험법(奴婢按驗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제도는 노비인 사람을 두고 제대로된 절차를 거쳐 노비가 된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검사해서 확인해 보고, 만약에 노비가 된 사연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면 노비 신세에서 풀어 준다는 제도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노비들이 이 제도를 이용해서 노비 신세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 노비가 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정식 절차를 차근차근 거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꼼꼼히 문서 작업을 해 두지도 않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이 노비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당연히 노비를 많이 갖고 있는 노비 주인들은 반발했을 것입니다. 요즘 펀드에 들거나 주식을 사듯이, 노비 제도가 합법이었던 그 시대에는 재물이 있으면 노비를 사서 모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류가 미비하면 나라에서 그 노비를 풀어 주라고 강제로 지시한다는 이야기라니, 앉아서 갑자기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것 같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쌀이나 옷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구했는지 영수증이 없으면 나라에서 그냥 막 가져 가도 되는가? 노비도 쌀이나 옷처럼 내 재산인데, 검사해 보고 확실하지 않으면 노비를 그냥 풀어 준다는 법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아닌가?"


노비 주인들은 이것이 임금의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노비가 자유를 찾으면, 나라에서는 그 사람에게 세금도 물릴 수 있고, 군인이 되도록 징병할 수도 있습니다. 임금이 지배하는 옛 군주제 국가에서 모든 백성이란 어찌보면 결국 임금의 노비나 다름 없는 신세입니다. 그러니, 이 당시에 노비를 해방해 준다는 것은 결국 노비 주인의 노비를 빼앗아서 임금에게 준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반발도 많았고 혼란도 많았습니다. 어제까지는 노비라서 죽어지냈지만, 광종의 이 새로운 제도 때문에 하루 아침에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을 증오하고 반발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고려사절요"에는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저 재미로 해 보는 제 상상이기는 하지만, 이런 시절이었다면 자유를 찾고 싶은 노비를 위해서 적당히 서류을 꾸며 주는 업자가 활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안검노비 떄문에 노비 신세에서 벗어난 사람이 광종의 은혜에 감격해 광종의 명령이라면 무슨 나쁜 짓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떠오르고, 안검노비로 노비 신세에서 벗어난 사람이 노비 시절에 자기를 억울하게 대한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 다니며 복수하려는 이야기도 있을만 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혼란이 심하고 이 법을 싫어하는 세력가들이 워낙 많다 보니, 광종의 부인인 대목왕후가 간절히 이 제도를 중지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광종은 자식이 다섯 있었는데 대목왕후가 그 다섯을 다 낳았습니다. 그러니 광종과 대목왕후는 상당히 친밀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종은 대목왕후가 간절히 부탁했는데도 안검노비를 계속 시행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임금으로 광종이 유명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광종이 대목왕후 한 사람하고만 친밀했던 것도 어찌 보면 광종의 차가운 계산이었다는 상상도 해 볼만 합니다. 대목왕후는 황보씨 집안 사람이었는데, 그쪽 집안의 세력이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필요했기 때문에 광종이 대목왕후와 아들 딸 낳으며 친밀히 지냈다고 상상해 볼 만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힘을 기른 상황이 되자 광종은 이제 그런 연극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황보씨가 되었든, 친밀한 척 하던 부인이 되었든 그때부터는 다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다면, 대목왕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광종은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돌아 보면 반대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안검노비를 시행한다는 것은 아주 영리한 작전임은 분명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안검노비는 명분이 좋고 뜻이 너무 좋아서 반대하기가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광종이 자기 적들의 재산을 일방적으로 빼앗는 제도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못 해서 노비신세가 된 사람에게 다시 자유를 주겠다고 나라에서 나선다는데, 이런 좋은 목적을 함부로 반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내 재산 함부로 빼앗지 마라” 정도의 언뜻 치사해 보이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막아 서기가 쉽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노비는 사람이라는 것도 굉장히 광종에게 유리한 장점이었습니다. 만약 광종이 금은과 보석을 빼앗은 것이었다면 광종의 힘이 약해졌을 때 도로 금은을 되찾아 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광종이 약해져서 그 적들이 노비를 되찾으려는 때가 설혹 올지라도 한번 자유를 얻은 사람을 다시 붙잡아 고분고분한 노비로 되돌리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버티고 저항하며 도망칩니다.


그런데 광종에게는 안검노비 정도도 가벼운 몸풀기에 불과했습니다. 광종이 정말로 무서운 면모를 보여 주는 때는 안검노비를 시행한 지 4년이 지난 후인 960년입니다..


그 해에 권신이라는 사람이 준홍과 왕동이라는 사람이 반역을 모의했다는 것 같다고 광종에게 일러 바칩니다. 광종은 당연히 이 두 사람을 처벌합니다.


광종은 그 동안 재물도 모았고, 자기에게만 충성할 신하들도 모았으며, 한편으로 자신을 위협할 사람들이 노비를 잃게 해서 약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옥좌를 차지한 지 무려 1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10년을 준비한 것이 바로 경신년인 960년에 뒤엎어버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 해부터, 권신의 고발을 시작으로 광종은 자신의 임금 자리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사람들은 강력하게 다 쓸어 버리듯이 처벌하기 시작합니다.


광종은 조그마한 의심할 만한 점이라도 고발이 들어 오면, 바로 그 사람을 붙잡아 조사하고 처벌했습니다. 천 년 전의 범죄 조사라는 것이 결코 평화로운 일일리는 없으니 분명 잔인한 고문도 이루어졌을 것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시절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 두었는지 감옥에 사람이 가득 차서 임시 감옥으로 쓸 곳을 급히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감옥을 지었던 사람도 "감옥을 너무 작게 지은 죄"로 감옥에 가지 않았을지요?


그러다 보니 못 믿는 사람들끼리 당하기 전에 먼저 고발해버리는 문화가 생겨 버려서, 조금만 다투는 사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는 사람들끼리도 마구 고발해서 서로 감옥에 가두고 없애버리려는 일이 광범위하게 퍼져 버렸고, 광종도 갈 수록 점점 더 의심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두고, 최승로는 나중에 "시무28조"와 함께 쓴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 어머니를 거스르고 (子逆父母 자역부모)

종살이 하는 사람이 자기 윗 사람에 대해 따지며 (奴論其主 노론기주)

윗 사람과 아랫 사람 사이의 마음이 멀어지고 (上下離心 상하리심)

여러 신하들이 서로 쪼개져 흩어졌다 (群臣解體 군신해체)


광종 편에서 보자면, 뭔가가 오랫 동안 잘못된 점을 뿌리 뽑아 바꾸는 큰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자식이 부모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고, 종이 자기 윗 사람에 대해서 따질 기회도 정말 주어져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자식 사이, 윗 사람-아랫 사람 사이의 굳어진 관계에서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문제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뒤엎어 배반하듯이 잘못을 고발하게 하는 것도 변화의 시대에는 필요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시기 광종이 많은 사람들을 가두고 목숨을 잃게한 것에 대해서는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워낙에 많습니다. 본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서 공신이라고 해 준 신하들은 3200명 가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승로가 “시무28조”와 함께 발표한 글을 보면, 광종 때의 어마어마한 투옥, 조사, 처벌 때문에 살아 남은 옛 신하들의 숫자는 불과 4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수경도 이 시기의 혼란을 잘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박수경이라는 신하는 왕건을 도와서 전쟁터에서 공을 많이 세웠고, 광종의 형인 정종도 많이 도와 주었으며, 아마도 광종에게도 도움을 많이 주었던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수경의 아들인 박승위, 박승경, 박승례 셋이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그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결국 박수경이 세상을 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상상해 보자면, 광종이 예전에 박수경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못 믿는 사람들을 처벌하더라도 당신만은 절대 믿고 해치지 않겠다"라고 박수경에게 말 해놓고는, 나중에는 박수경도 제거해버리고 싶으니까 박수경 본인 대신에 박수경의 가족들을 모두 다 괴롭혀 버린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광종은 나중에는 자기자신의 친자식 조차도 자신의 임금 자리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여러가지로 의심하며 냉랭하게 대할 지경이 되어버립니다.


한편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는 안검노비를 두고 너무 쉽게 노비를 풀어 주어서 함부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제 더 이상 상을 내리고 은혜를 베풀 것이 줄어든 것이 잘못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여러 가지 변화의 영향으로 광종 시대 후기에는 사람들이 광종만 무서워할 뿐, 윗 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업신여기게 되고 온통 나라에 서로 못 믿고 배반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면서, 글로 이렇게 써서 비판했습니다.


“천한 사람들, 묶여 있었던 자들이 뜻을 얻고, 존귀한 것을 능멸하게 되었다 (賤隷得志 凌轢尊貴 천예득지 능력존귀)”


다만, 현대에 보면 말의 앞 부분은 정반대로 오히려 근사한 말처럼 보입니다. "천예득지(賤隷得志)", 곧 “천한 사람들, 묶여 있던 자들이 뜻을 얻는다”라니, 시대가 급하게 바뀌는 것을 설명하는 말치고는 멋져 보입니다.


또 어떤 시대를 두고, "천예득지의 시대", "묶여 있었던 사람들이 뜻을 얻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요?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33편 정도만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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