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백과에는 여러 가지 거인들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보다가, 저는 어느새 잊혀진 옛날 이야기의 한 분야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석사 감로왕탱 중 발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석사 감로왕탱 중 발췌

우선 한국의 거인 이야기 중에 거의 가장 옛날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사례는 중국 고전 “박물지”에 실린 “옥저”이야기 입니다. 여기서는 중국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고구려 동쪽 끝까지 갔다가 들은 것이라면서, “옥저”의 한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 몇 가지가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노인은 여자들만 사는 나라인 여인국 이야기 등과 함께 바다 건너 동쪽에서 시체를 건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시체 옷의 소매 길이가 세 길, 그러니까 수 미터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사람 이야기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엄청나게 소매만 길다란 괴상한 옷을 입은 사람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 책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실리는 바람에, 그 뒤의 삼국, 고려, 조선 학자들도 읽은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본격적인 거인 이야기는 나중에 나온 중국 책 “기문”에 실린 “장인국(長人國)” 이야기를 꼽을 만 합니다. 이것은 신라 동쪽에 장인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의 “장인(長人)”들은 키가 세 길, 그러니까 사람 키의 다섯 배, 여섯 배 정도이고 이빨은 톱과 같고, 손톱은 갈고리 같으며, 벌거 벗고 사는데 몸은 검은 털이 많이 나 있고, 동물을 익히지 않고 먹고, 가끔 사람도 잡아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산골짜기를 철문으로 봉쇄하여 “철관”을 만들어 놓고 항상 쇠뇌 쏘는 병사 수천명을 배치해 지키고 있다는 말이 따라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 전후 무렵 떠돌던 소문이 실린 것인데, 이것이 중국 역사서 “신당서”에도 실렸고, 그 바람에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에도 인용된 덕에 상당히 널리 알려졌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당서”의 이 기록은 소문일 뿐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동해 건너의 외딴 섬에 커다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동사강목” 역시 이것을 헛소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슬쩍 말을 덧붙여서, “장인들은 다른 나라의 여자들을 붙잡아서 옷을 만들게 시킨다”는 다른 중국 기록을 보충해 놓았습니다.



통영 문화동 벅수
통영 문화동 벅수

이렇게 해서, “바다 건너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거인 이야기”는 하나의 유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중국 당나라 때에는 바다 건너에서 중국을 찾아 오는 사람들 중에 신라 사람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바다 건너 이상한 곳”에 관한 설화가 신라 뱃사람, 신라 사신과 엮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짧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기문”에는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갔다가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위의 “장인국” 같은 곳에 가서 잡혀 먹힐 위기에 쳐했는데, 붙잡혀 있던 베 짜는 여자들과 함께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옥당한화”에는 당나라 사신이 신라로 가다가 거인이 사는 섬에 표류했는데 도망치다가 칼로 거인의 손가락을 잘라낸 것을 조정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영표록이”에는 당나라 사람이 표류하다가 어떤 섬에 도착하니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신라 사람이 그곳이 개들의 나라, 즉 “구국”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거인이 사는 “대인국”에도 들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 당나라 때는 신라와 바다 건너 이상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예를 들면 “유양잡조”의 장수국과 용궁 이야기, “박이지”의 신선들이 사는 섬 이야기, “전당시주”의 인어가 짠 옷감 이야기, “소하록”의 백룡의 가죽 이야기 등등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중국 송나라 때 “태평광기”에 실렸고 상당수 항목은 “신라”라는 항목명으로 편집 되었는데, “태평광기” 자체도 고려, 조선에도 들어와 유통 되었으므로 고려, 조선의 몇몇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거인 이야기는 앞서 “장인국” 이야기와 합쳐져서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어우야담”에도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커다란 거인 이야기가 하나 나오고, 그 뒤의 “지봉유설”에는 직접 거인이 등장하지 않지만 표류해서 어떤 섬에 갔는데 커다란 신발이 있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퀴클롭스 이야기와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용주유고”의 “통천해척표풍설”에는 어부들이 표류해서 거인 섬에 갔는데 남녀 거인들이 너무 사나워서 거인의 외양간에 숨어 있다가, 말과 소를 방목할 때에 말 떼, 소 떼에 섞여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세기가 되면 정말 직접, 간접적으로 “오디세이”가 전해진 것인지, 거인의 눈을 찌르고 도망치는 무척 비슷한 이야기가 생겨 나는데, 이런 것이 “해동야서”, “청구야담”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약간 방향은 다르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흉한 징조로 거인의 시체가 물에 떠내려 왔다는 이야기가 실린 것이 몇 차례 나옵니다. 이 역시 바다 건너의 거인 이야기와 통하는 느낌이 납니다.

바다 건너 알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 키의 열 배에서 수십 배 정도 되는 크기의 거인 이야기는 이렇게 오랜 기간 꽤나 여러번 나왔던 것입니다.

신라 토우
신라 토우

한편, 이런 형태 이외의 거인 이야기도 두 종류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보통 사람 크기의 서 너 배, 네 다섯 배 정도 되는 무섭고 잘 싸우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바다 건너의 거인 이야기 못지 않게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길거리에서 시비 걸던 덩치 좋고 무서운 사람, 무서운 장수에 관한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 답게 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두번째로, 손으로 산을 만들고 발로 강을 만드는 크기의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 이야기도 꼽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과거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이며, 현대에 수집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에서는 사례가 꽤 보입니다. 장길손이 산을 만들었다든가, “창세가”에서 먼 옛날 거인이 손으로 해와 달을 떼어 냈다든가 하는 이야기등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현대에 전래된 해외 신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저는 짐작합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18세기 이전의 기록에서 이렇게 산과 바다 만큼 큰 거인 설화는 장한철 “표해록”에 나오는 선마선파(詵麻仙婆) 이야기 정도 입니다. 선마선파 이야기는 제주도에서 현재 “설문대할망” 이야기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한국 거인 이야기의 대표를 꼽는다면 역시 바다를 표류하고 탐험하다가 신비한 섬에서 무서운 거인을 만나는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대관령박물관 소장 신라 금강역사상
대관령박물관 소장 신라 금강역사상

그러고 보면, 바다를 탐험하는 신비한 이야기가 한국에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실린 “거타지” 이야기는 거의 전형적인 신라의 바다 탐험 이야기였습니다.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뛰어난 주인공이 그 섬에서 용왕과 괴물을 만나 모험을 하고 용왕의 딸과 함께 떠나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거의 그대로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 이야기로도 반복 되었습니다. 다른 예로는 “홍길동전”에서 섬에 사는 용의 딸을 구하는 이야기도 이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신비한 모험담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벼락 출세한 장보고 이야기나, 단편적인 내용이지만 일본 기록에 남아 있는 신라 해적들의 이야기도 위험과 함께 뭔가 놀라운 일이 있는 바다 이야기의 분위기를 돋운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저는 꼭 “아라비안 나이트”나 대항해시대 유럽 선원들의 모험이 아니더라도, 신라 선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바다 모험 이야기는 자연스러울 정도라고 생각 합니다.

환상적인 옛날 이야기라고 하면 귀신이나 저승이 나오는 이야기만 지나치게 너무 많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대로 현실적인 옛날 모험담이라면 부조리한 벼슬아치 양반들을 향해 억울한 사람들이 저항하는 이야기만 또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것 못지 않게 바다 건너 신비한 곳들을 떠돌며 탐험하는 모험담도 좀 더 많아졌으면 바래 봅니다.

조선 말 쇄국정책과 척화비의 느낌 때문에, 우리 나라 옛날 이야기는 해외의 먼 바다를 탐험하는 것을 얼른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막상 찾아 보면, 조선 시대 기록에도 저승 탐험 이야기 못지 않게 바다를 탐험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위도에서 안전한 항해를 비는 의식에 사용되던 풀로 만든 배 모형
위도에서 안전한 항해를 비는 의식에 사용되던 풀로 만든 배 모형

한국 전설 속의 거인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 본다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배를 타고 다니는 신라 장사꾼들이 거인 하나를 생포해 와서 서라벌에 데려 와서는 구경거리로 팔아 먹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라에는 강력한 신분제도가 있었으니 좀 더 절절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장보고 같은 뱃사람 출신의 야심가가 서라벌에서 반란이나 테러를 일으킬 때, 술에 잔뜩 취하게 해서 몰래 배에 싣고 온 무서운 거인을 서라벌 거리에 풀어 놓는 장면도 상상해 봅니다.

아니면, “장인국”과 “철관” 이야기를 아예 확 살려서, 거인 종족이 무슨 이유인지 끝없이 철관을 넘으려고 자꾸 쳐들어 오고, 신라의 쇠뇌 쏘는 병사들과 사냥꾼들은 거인들과 끝없이 싸우며 여러 모험을 하는데, 그 와중에 평화를 중재하려는 사람도 있고, 뭐 그런 이야기도 잠깐 떠올려 봅니다.


* 중국 당나라등 외국 기록 속의 기이한 신라, 삼국 이야기는 차차 따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본문 내용은 끝입니다. 아래 유료 부분에는 후원자님들을 위한 감사 인사만 두 줄 정도 씌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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