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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포를 못 쓰게 하면 풍속을 혼란하게 하며 나라 이익도 안 될 뿐

한언공

1002년의 일입니다.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는 기록은 아닙니다만, 저는 어쩌면 이 해의 정책 하나가 이후 천 년에 가까운 한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것 아닌가 하는 몽상에 가끔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1002년 음력 7월 가을에 천추태후가 장악하고 있던 고려 조정에서 약간 독특한 정책을 하나 시행했다는 말이 "고려사절요" 등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돈, 즉 화폐를 퍼뜨리는 일에서 후퇴한 것입니다.


천추태후 시대 직전의 임금인 성종 시절에는 조정에서 중국 송나라의 문화가 발전된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풍조가 강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특히 조정에서도 많이 노력을 기울였던 분야가 바로 돈, 화폐를 만들어 나라에서 유통시키고 그것으로 상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한국사에서 고려 시대 이전에도 돈을 만들어 썼다는 주장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경위와 발행 내역이 명확한 사례로는 고려 성종 시기인 996년에 건원중보라는 엽전을 만들어 사람들이 쓰게 한 것을 최초로 꼽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돈이라는 것을 쓰는데 사람들이 별로 익숙하지 않던 세상에서 어떻게든 돈을 사용하며 사는 문화를 퍼뜨려 보려고 성종 시기 고려 조정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때 까지 사람들은 주로 쌀이나 옷감을 이용해서 상거래를 했습니다. 쌀이나 옷감은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필요한 물자이니, 시장에서 물건을 구할 때는 쌀이나 옷감을 주고 구하고 싶은 물건으로 바꿔 오는 물물교환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보면서 돈을 이용해서 거래를 하게 하면 훨씬 간편하며 유용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경제 발전을 위해 고려에서도 엽전을 찍어 내어 퍼뜨리는 것을 시도 했습니다. 보통 엽전은 구리나 구리 합금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고려에서 찍어낸 건원중보라는 엽전은 특이하게도 철로 만든 철전이었습니다.


성종 시기에 건원중보를 유통시킨 일은 그냥 무턱대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습니다. 돈이 유통되는 일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성종은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선, 돈을 쓸 곳을 만들기 위해 돈을 받고 술과 음식을 파는 주점(酒店)과 차를 파는 커피 가게 같은 곳인 다점(茶店)을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주점은 주점육소라고 하여 성례(成禮), 낙빈(樂賓), 연령(延齡), 영액(靈液), 옥장(玉漿), 희빈(喜賓)이라는 나라에서 운영한 주점 여섯 군데의 이름도 남아 있으며, 다점도 어느 정도는 발달했던 듯 합니다.


몇 년에 걸쳐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조정은 돈을 유통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거래에 최대한 엽전을 널리 사용하도록 몇 가지 강제 규정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생겨난 부작용도 심각했던 듯 보입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천추태후의 세상으로 바뀌고 1002년이 되었을 때, 한언공이 상소를 하나 올립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상거래에서 돈만 쓰게 하고, 추포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풍속을 혼란하게 하며 나라의 이익도 되지 못합니다. (禁用麤布 以駭俗 未遂邦家之利益 금용추포 이해속 미수방가지이익)"


여기서 추포라는 것은 옷감 중에서 아주 질이 떨어지는 옷감을 말합니다. 거의 사람이 옷으로 만들어 입을 수 없을 정도의 싸구려 옷감이 바로 추포입니다. 아마 걸레나 수건 정도로나 겨우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별로 가치 없는 값싼 물건들을 사고 팔 때 예전에는 이 추포를 잔돈처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종 시기에 사람들이 돈을 활발히 쓰도록 하기 위해서 추포를 사용하는 것을 아예 금지시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포는 워낙 쓸모 없는 옷감이니 어차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싼 물건을 거래할 떄 추포로 계산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추포 같은 것은 쓰지말고 대신에는 돈을 써라, 그런 식으로 강제 정책을 만든 것입니다.


한언공 상소에 따르면, 이렇게 했지만 돈을 쓰는 제도가 그때까지도 잘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건원중보를 발행한 지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돈을 쓰는 일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슨 혼란이 있었을까요? 단순히 그냥 많이 귀찮다는 정도였을까요? 아니면 화폐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게 되는 전황 현상이 발생했을까요? 아니면 화폐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있었다거나, 위조 돈이 기승을 부렸다거나, 돈을 이용해서 다른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거나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란과의 전쟁 후유증 때문에 경제 혼란이 생겼다거나, 또는 국제 관계가 바뀌면서 무역이 변화를 받는 바람에 경제 혼란이 생겼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 시기 화폐 경제의 혼란기를 틈탄 사기꾼이나 경제난에 대한 이야기도 이것저것 상상해 보면서 떠올려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한언공은 주점, 다점 같이 원래 돈을 받기로 계획하고 시작한 곳은 그대로 운영하되, 각 지역의 사사로운 거래에서는 그 지역마다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것도 허용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니까, 성종 시대에는 강제 규정을 이용해서라도 강력하게 돈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쓰자고 정책을 이끌고 나갔지만, 사람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기고 있고 부작용이 많아 적응을 못하니 어느 정도 포기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언공 상소의 핵심이었습니다.


한언공 상소는 결국 받아 들여집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에 돈을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늦춰지게 됩니다.


한언공 상소가 맞는 이야기였다고 본다면, 정부의 금융이나 경제 정책이 현실을 무시하고 어떤 꿈 같은 외국 사례만 보면서 함부로 시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정책 중에 취지는 좋지만 너무 무리하게 시행해서 억지스러운 꼴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말고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과 현실에 맞춰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 보면 한국사에서 화폐 사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약간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웃인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히 화폐를 유용하게 써오고 있었고 고려 시대인 송나라 무렵에는 돈을 찍어 내어 사용하는 것이 굉장한 수준으로 발전 될 정도였습니다. 다른 이웃인 일본에서도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한반도 보다는 좀 더 화폐 사용에 대한 기록과 증거들이 풍부한 편이고 그에 맞추어 상업도 조금 더 빨리 발전해 간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라고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한반도에서는 왜 돈이 잘 사용되지 못한 것일까요?


일단 쉬운 설명은 그만큼 경제와 상업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경제와 상업이 아주아주 많이 발전했다면 분명히 돈이 훨씬 활발히 쓰이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사의 사례를 보면 당시 고려 정도 보다 더 경제 규모나 경제 수준이 뒤떨어지는 곳에서도 돈을 사용한 사례는 있어 보입니다. 저는 무엇인가 다른 설명도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언공 상소는 잘못된 정책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1002년에 한언공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만 더 강제로 돈을 활발히 쓰게 했다면 결국 돈을 쓰는 문화가 한반도에 자리 잡고, 경제 발전이 더 활발히 이루어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나라가 되며, 이후 한반도의 역사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요? 오히려 사람들이 더욱 더 돈을 많이 접하고 많이 쓸 수 있도록 더 강한 정책을 마련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재미 삼아 과장해서 말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한언공 상소를 받아들인 1002년 음력 7월의 결정이 이후 1천년 동안 한반도를 "돈을 만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한 순간이라고 해 보면 어떨지요?


그렇게 본다면, 백성들이 조금 불편해하고 귀찮아 한다고 해도, 정말 중요한 어떤 경제 정책이나 상거래 정책은 문화를 바꾸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정부가 강제 규정으로 밀어 붙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한언공 상소의 진정한 교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야기를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이때 1002년의 한언공 상소를 받아들인 결정이 천추태후의 뜻인지 목종의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언뜻 보면, 화폐를 퍼뜨리자는 것은 성종 시대의 정책이었고 천추태후는 성종을 싫어했으니까 천추태후가 화폐의 단점을 지적하는 한언공 상소를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인 듯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천추태후는 무턱대고 무작정 성종 시대의 정책을 반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조정을 장악하고 5년여 동안 유지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천추태후도 돈을 활발히 퍼뜨리려는 정책에는 찬성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1002년, 이 무렵은 목종 또는 천추태후의 반대파들이 천추태후에게 잠깐 맞서 보려고 도전하던 때였습니다.


한언공 상소의 주인공 한언공은 성종 시절부터 꾸준히 신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천추태후를 속으로 싫어했을 지도 모릅니다. 1001년에는 목종이 한언공의 본관이었던 마을에 명예를 내리면서 목종과 한언공이 약간 사적으로 친밀한 듯한 모습을 보인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편안함을 위한다는 이유로 화폐를 퍼뜨리려는 무리한 정책을 멈춘 것은 도리어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 목종과 천추태후 반대파들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면 어떻습니까? 완전한 상상일 뿐이지만,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돈 찍어내는 곳을 장악하고 경제를 휘어 잡아 더 큰 세력을 모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저지한 싸움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재미는 있어 보이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 엽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공공누리1


한국사에서 화폐가 활발히 쓰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렇습니다만 저는 여전히 고려 시대에 화폐의 보급에 충분히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좀 더 연구가 이루어져서 더 많은 사연을 읽고 싶습니다. 당시 송나라와의 무역 관계에서 원인을 찾거나, 엽전의 재질이 철이었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는 연구도 저는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엽전 실물의 성분을 분석해 보는 실험이나, 금속 원소의 특징으로 산지를 조사해 보는 실험 같은 것을 더 많이 해 본다면, 뭔가 새로운 사실이 더 나올 지도 궁금합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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