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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의 술을 임금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서희

993년의 일입니다.


이 해에 있었던 전쟁은 수십년간 긴 평화 시대를 보낸 고려 조정이 갑자기 전쟁을 겪는 바람에 굉장히 겁을 먹은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위기에서 서희의 협상으로 기발하게 결말을 맺고 평화를 찾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전쟁을 흔히 "거란의 1차 침입"이나 "1차 여요전쟁"이라고 하며, 조선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서는 993년이 계사년이라고 해서 "계사지역(癸巳之役)"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서희가 협상을 위해 거란 군사 가운데에 찾아 가서 머문 기간은 총 7일 동안이었습니다. 협상 결과, 전쟁은 멈추고 거란 군사는 돌아 가며, 고려는 강동6주를 차지 하고 그 지역의 길을 이용해서 거란과 교류하며, 교류하면서 고려가 거란 임금에게 예의를 표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희가 협상을 어찌나 잘했는지, 협상이 끝나고 돌아 오는 길에 적이었던 거란의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마리, 양 1000마리, 금기(錦綺), 나환(羅紈)이라고 하는 비단 도합 500필을 서희에게 선물로 주기까지 했습니다. 소손녕이 서희와 같이 한참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협상 전까지 서로 목숨을 빼앗으려고 다투던 전쟁 상대방에게 협상이 끝나자 선물을 잔뜩 안겨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 100마리, 양 1000마리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소손녕이 좀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많은 선물을 서희에게 주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고려와 거란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상황이니 거란에서 "우리 거란이 송나라 같은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더 넉넉하고 관대한 더 큰 나라다"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선물을 많이 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이 양은 너무 많아 보여서 거의 줄 수 있는 한계 만큼 많이 준 것 같습니다. 도대체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정복할테니 다들 강가에 나와서 항복해라"고 했던 그 소손녕에게 서희는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까지 태도를 바꿔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더 이상 없습니다. 짐작이 가는 것은 서희가 분위기를 돌려서 이제는 소손녕 쪽에서 협상이 깨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안달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서희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융숭히 대접해 주어서, 꼭 협상을 이대로 이뤄지게 해야 한다고 도리어 소손녕이 매달리게 한 듯 싶습니다.


도대체 서희가 무슨 수를 썼을지요? 제가 하나 짐작하는 것은 알려져 있는 기록 중에 서희가 "이야기를 거란의 황제 폐하의 귀(天聰)에 들리게 해 달라"라고 언급하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소손녕도 따지고 보면 거란 임금의 신하로 임금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 마음을 거스르면 관직 생활이 괴로워지는 벼슬아치였습니다. 벼슬아치 생활을 더 오래 해 본 서희는 아마 같은 벼슬아치로서 어떤 것이 임금-신하 사이에서 골치 아픈 고민거리인지를 내다 보고, 바로 소손녕의 그런 점을 찔렀던 것 아닌가 한 번 추측해 봅니다.


"고려사절요"에는 소손녕이 협상에 응하여 서희에게 선물을 주기 전에, 거란 임금에게 물어 보았더니 담판을 받아들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짧은 언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거란은 임금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로 임금의 어머니인 소 태후가 대신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런 복잡한 관계에서 뭔가 소손녕이 골치거리가 될만한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서희는 그런 신하로서 처신하기 힘든 골치 아픈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내다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지어내 보자면, 소 태후가 소손녕에게 고려를 공격하기는 하되, 너무 시간을 오래 끌거나 군사를 많이 다치면 안 된다고 당부를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거란의 정치 상황 때문에 이 지시를 어기면 소 태후가 자신에 대한 반항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싫어할 상황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때 만약 서희가 이렇게 이야기해 왔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고려 조정에서는 너무 화가 나서 무조건 거란과 싸우자는 이야기 뿐이다. 전쟁을 멈추려고 하는 제정신인 사람은 고려 전체에서 지금 여기 있는 나 밖에 없다. 만약 지금 나와 협상을 할 기회를 놓치면 고려는 이기든 지든 따지지 않고 진흙탕처럼 달라 붙어서 1년이고, 10년이고 계속 싸우며 버틸 것이다."


소손녕으로서는 '정말 그렇게 전쟁이 길어지면 위에서 욕 먹고 벼슬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는데'라고 걱정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이었다면 어떻게든 서희가 제시하는 괜찮은 조건을 꼭 잡아야겠다고 소손녕은 결심할 것입니다.


여전히 정확한 협상과 담판의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서희는 소손녕 같이 꾀가 많은 인물도 마음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서희의 생각을 지금 다 짐작해보겠습니까만은, 어찌 되었건 협상을 하고 서희가 돌아 오자 고려 조정은 대단히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상상 이상의 좋은 조건이라고 너무나 좋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즉시 박양유를 거란의 임금에게 보내서 인사를 하게 하고 거란 임금을 높은 위치로 대접해 주는 예의를 표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에도 서희는 "당장 그렇게 낮게 나갈 필요가 없다. 여진 사람들을 다 몰아내고 나서 거란과 통하겠다고 했으니, 우리 북쪽 지역을 충분히 더 튼튼히 할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가 움직여도 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역시 간이 크고 배짱이 두둑하며 보는 시각이 정확한 사람 다운 주장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면 끔찍하게 여긴 성종과 조정 사람들은 간신히 평화의 기회를 얻었는데 놓치면 안 된다면서, 당장에 사절을 거란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후삼국통일 이후 고려가 다른 나라와 크게 싸운 첫번째 전쟁인 계사지역이 끝나게 됩니다.


한편, 계사지역이 있고 나서 11년 후인 1004년, 거란은 이제 중국 송나라를 크게 공격합니다. 계사지역에서 협상했던 대로 고려는 거란과 친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거란은 고려의 위협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란은 마음 놓고 송나라하고만 싸우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1004년 송나라와 거란 사이의 전쟁은 기이하게도 그 11년 전 고려와 거란이 싸운 계사지역과 아주 심하게 비슷합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해 임금이 전쟁터 근처로 가까이 찾아간 것도 같고, 그렇게 갔다가 거란이 잘 싸우는 바람에 임금이 겁을 먹었던 것도 같습니다. 겁에 질린 조정 사람들이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뭐든 갖다 바치자고 할 때, 고려에는 서희가, 송나라에는 구준이라는 신하가 있어서 그렇게 비굴해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린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두 사람 덕분에 임금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이때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 협상을 마치고 서로 합의한 맹세를 흔히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고 합니다.


전연지맹에서는 약간 복잡하게, "송나라 임금이 자신의 작은 어머니를 대하는 예절로 거란 임금의 어머니인 소 태후를 대한다"라고 맹세 합니다. 이게 교묘한 것이, 거란 입장에서는 거란 궁전의 어른인 소 태후가 송나라 임금을 조카로 삼는 것이니 거란이 송나라 보다 높은 느낌인 것 같이 됩니다. 반면 송나라 입장에서는 촌수를 따져 보면 송나라 임금이 거란 임금의 사촌 형이 되는 셈이니 임금 대 임금으로 보면 송나라가 거란 보다 높은 느낌인 것 같게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이때의 협상으로 송나라가 거란에게 매년 비단 20만필, 은 10만냥 즉 대략 3~4톤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는 조건이 덧붙여져 있다는 점이 후대에 훨씬 더 자주 언급됩니다. 아무래도 이 조건 때문에 전연지맹은 송나라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기 위해 거란에게 굴복하는 듯한 모양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에는 이때를 두고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중국에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를 보면 송나라의 울분을 표현한 것들이 많습니다.


"14인의 여걸(十四女英豪)"이라는 197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의 영화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인간 다리 장면으로 유명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송나라와 서하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능파가 연기한 목계영이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인데 이 영화의 원작인 옛 소설 "양가장연의", "양가여장"에서는 바로 그 목계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거란과 잘 싸운 사람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거란의 전쟁을 이끌기도 하고 거란을 실제로 지배했던 인물은 사실 거란 임금의 어머니였던 소 태후였는데, 소설이 나올 당시에 "여성 주인공 목계영과 여성 악역 소 태후가 싸운다"는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서 인지 그 때에는 더 인기가 있었던 듯 합니다. 또 1993년판 "판관 포청천"에서도 "북소리(三擊鼓)"편은 송나라에 온 거란의 사신이 횡포를 부린다는 것이 주요 소재였습니다.


14인의 여걸. 요즘에 다시 나온 판본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가 거란과의 싸움으로 소설에서 유명했던 목계영 역할의 능파입니다.)

14인의 여걸. 옛날 판 포스터

(포스터에서 제목 글자 바로 옆에 보이는 배우가 소설에서 거란과의 싸움으로 유명했던 목계영 역할의 능파입니다.)

포청천

(북소리 편의 거란 사신. 거란 임금의 자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가 중국에서 두고두고 유행하다 보니 그에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소설 중에도 중국 송나라를 배경으로 할 경우 거란이 주인공의 시련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소설 "옥린몽"은 배경이 중국 송나라인데 남편 한 사람을 두고 두 부인이 다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거란에 갔다가 붙잡히는 바람에 두 부인의 다툼이 더욱 꼬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조선 시대 소설 "현몽쌍룡기" 역시 배경이 중국 송나라인데 거란이 침공해 왔을 때 주인공 조무가 활약한다는 내용을 다룹니다.


조선시대 소설 옥린몽 1권 1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서희는 이후에도 계속 명망을 유지하며 고려의 훌륭한 신하로 대우 받았던 듯 합니다.


한번은 서희가 해주에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있을 때, 성종이 서희를 찾아 온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희가 진영에서 머무르는 막사에 성종이 들어 가려고 하자, 서희는 "신하의 막사는 임금께서 오실 곳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막았다고 합니다. 또 성종이 서희에게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고 술을 달라고 하니, "신하의 술을 임금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臣之酒 不堪獻也 신지주 불감헌야)"라고 하며 거절했합니다. 그래서 막사 밖에 앉아서 성종이 따로 술을 내어 오라고 하여 어주로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일이 많으면 음모를 꾸미게 되거나 이상한 소문이 돌 위험이 있고, 또 신하가 임금에게 술을 주면 그것이 뇌물이 되는 수도 있고 반대로 독을 탔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의심 받을 행동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뇌물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작은 것, 술 한 잔이라도 공직자 사이에서 주고 받으면 안된다는 이야기이니, 요즘의 김영란법과 비슷한 말을 1000년 전의 서희가 꺼낸 셈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임금이 너무 누추한 곳에 오거나, 신하의 누추한 술을 임금이 받아들이게 해서 그 권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사소한 일에도 예의를 잘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화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의미가 당시로서는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왔을 겁니다.


이런 일화를 봐도 확실히 서희는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천추태후 시기까지만 다뤄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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