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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학보 / 봄비가 며칠이나 내린들 그대 잡았던 손의 향기가 씻기랴

정종

946년의 일입니다.


혜종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상을 뜨자, 혜종의 아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혜종의 아우인 정종이 뒤이어 임금이 되었습니다. 정종의 어머니와 외가는 세력이 강한 명문이었습니다. 앞선 인금인 혜종에게 계속 어머니가 미천한 가문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다녔던 것과는 완벽히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니 요즘 이야기를 꾸며 내는 작가들 중에는 무예가 뛰어나던 혜종이 허무하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한 것을 보면 정종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자기 친척들과 함께 음모를 꾸며 암살한 것 같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종종 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고려사절요" 같은 역사 책에는 정작 정종 본인은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겁쟁이 정종이 혜종의 임금 자리를 질투했다거나, 정종은 겁쟁이였는데 그 어머니나 친척이 부추겨서 정종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뒤 상황을 살펴 보면 임금의 자리를 위협하고 암살 음모가 계속되는 궁전의 상황 때문에 정종이 더욱 겁에 질린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아예 병이 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된 후 정종은 태조 왕건의 무덤에 찾아 가 인사를 올리는데, 거기서 태조 왕건이 "불쌍한 백성을 구하는 것이 임금의 일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옛 역사책에서는 태조 왕건은 혼령조차 백성을 아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정종은 그 계시를 받았다는 느낌으로 이런 기록을 남겨 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현대에 보기에는 이미 이때부터 정종은 병이 깊게 들어서 환청이 들리는 상태가 된 듯 합니다. 그래서 공황장애와 같은 다른 증상도 같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종은 자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불경을 읽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려 애썼습니다. 백성들에게 자신이 옥좌를 두고 친척끼리 다투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 불교를 열심히 믿는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정종은 946년, 왕건 목소리의 환청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아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라는 기관을 창설합니다.


여기서 "보(寶)"라는 것은 고려시대에 특히 유행한 기관인데, 누가 제법 큰 재물을 자본으로 내놓으면 그것을 투자하고 남에게 빌려 주었을 때 생기는 이자 수익을 이용해서 공공사업을 하는 재단입니다. 현대식으로 이야기하면 공공 기금인 셈입니다.


"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기관을 운영한 사례는 다른 나라에는 유래가 잘 나타나지 않는 한국사의 고유한 사례입니다. "고려사"에는 "보"라는 말 자체가 옛날 우리말을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연구를 보면 신라 시대인 6세기말 7세기초 무렵에 원광법사가 불교 사찰에 기부 받은 재물로 사업을 하기 위해 시작한 "점찰보(占察寶)"를 그 가장 오래된 사례로 보는 듯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보가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정종보다 20년 정도 앞서서 왕건은 930년에 "학보(學寶)"를 만들었습니다. 학보는 장학 기금으로 장학금이나 학문 연구 자금을 대기 위한 자선 기금이었습니다. 제가 상상해 보기에는 아마 당시 고려 조정에서 학문에 가장 밝았던 최응이나, 당시 새로 세웠던 교육 기관의 담당자 박사였던 정악, 그리고 원래부터 갑부집 자식으로 상업 활동에 대해 친숙했던 왕건의 생각이 같이 융합되는 가운데 "이런 '보'라는 것을 만들어 보면 오랫 동안 장학금을 주면서 학문을 발전시키기에 좋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나와서 탄생한 기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종 때 만들었다는 "불명경보"는 불교 경전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공공 기금이었고, "광학보"는 불교 학문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공공 기금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나중에 다른 임금의 시대에 의료와 병원 운영을 위한 공공 기금인 "제위보(濟危寶)", 팔관회 행사 자금을 대기 위한 "팔관보(八關寶)"등도 생깁니다.


이런 보에는 사무실도 있었고 재물을 저장할 창고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도 있어서 팔관보의 경우에는 높은 관리인 관원이 7명, 낮은 관리인 이속이 4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 이제현이 남긴 기록을 보면, 제위보에서 일하는 사람들 간의 사내연애로 보이는 장면을 소재로 삼은 "제위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위보가 의료, 병원을 위한 기금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치 병원에서 사내 연애를 소재로 하는 "종합병원" "응급실" 같은 연속극이 현대에 유행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제위보" 노래 가사의 내용은 백마랑(白馬郞), 곧 백마 탄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은 채 마음을 속삭였는데, "이제 삼월 봄비가 며칠이나 내리니 손에 남은 향기가 씻겨 가면 어쩌나"하는 것입니다. 제 느낌에는 어쨌건 그때껏 향기가 잘 안 씻겨지고 있다 의미가 더 강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 느낌의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 지금껏 생각난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전체를 읽어 보면 운율도 찰싹 들어 맞는 멋진 내용입니다. 사내연애가 아니라, 보내연애라고 해야 할지요?


보는 투자 수익을 계속 만들어야 하니, 당연히 직원 중에 계산과 수학에 밝은 사람도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팔관보의 경우 총 11명의 직원 중 1명 그러니까 9%는 계산과 수학이 직업인 산사(算士)였다고 합니다. 요즘 국민연금에서는 직원 중에 수학 전공자를 몇 명이나 채용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노후 대비를 위한 국민연금은 고려시대 식으로 말하면 병들고 힘없는 사람을 돕는 제위보에 가까운 느낌이고, 말을 새로 만들어 내자면 국민연금은 "노후보(老後寶)"라고 할만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물가 안정을 위한 기관인 상평창(常平倉)이라는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현대에 가끔 국민연금이 원래 목적 대신 주가 안정이나 경기 부양을 위해서 무리하게 돈을 쓴다는 비판이 나올 때면, 그런 상황은 "제위보가 상평창 역할을 하는 격"이라고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고려시대 특유의 장학 기금인 "학보"라는 말은 보물이라는 뜻인 "보"의 글자 의미도 좋아서, 장학재단 이름으로 지금 사용해도 좋은 말일 듯 합니다. 갑순이라는 사람이 만든 장학재단이라면 "갑순학보"라는 식으로 이름을 지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정종이 여러 보를 만든 지 30여년 후인 982년에 최승로가 발표한 "시무28조"라는 글을 보면 각종 "보"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하지 못하고 그냥 이자 수익만 높이려는 고리대금업자로 전락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선 기금의 뜻이 변질되는 것은 예로부터 문제였나 봅니다.



* 사극 같은 곳에서 매번 "사면초가"나 "삼고초려" 같은 중국 고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슷비슷한 고사성어만 나오는 것이 좀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에 인기 있었던 명언이나 유행어 같은 것을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오히려 한국사의 유명한 말을 더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이야기 자체가 참신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의 유명한 말인 만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영화, 사극 같은 것에서 주인공들이 옛 역사를 인용하는 대사로 써 먹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33편 정도만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대목 있거나 다른 의견 있으시면 언제고 덧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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